박경리문학공원  
 

인사말
공원소개
공원둘러보기
관람안내
공원이야기
오시는 길

제목
건축계의 공익요원 정기용 건축가
등록자 공원지기 등록일자 2011.03.18
IP 118.47.x.81 조회수 836

건축계의 공익요원 정기용 건축가
故 정기용 건축가의 명복을 빕니다.

한 사람의 건축가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기적을
박경리문학의집은 기억합니다.
         

“원주 전체가 박경리 선생님의 문학 정신과 사유가 근간이 되어 생성될 수 있는 문화도시 원주의 토대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획일화되어가는 건조 환경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도시를 점진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뜻으로 하는 일입니다.“

              - 2008 원주학심포지엄, 박경리기념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故 정기용 건축가는 한양대, 서울대, 성균관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생전 성균관대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문화연대 공공대표,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시건축연구소, 도시건축집단 ubac에서 작업을 이어왔다.
또한 '무주프로젝트'와 같은 지역 공공건물과 학교, 효자동 사랑방, 동숭동 무애빌딩, 영월 구인헌 등의 작업을 통해 건축의 공공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건축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MBC TV '느낌표'의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여해 순천과 정읍, 제주, 진해 등 6곳에 어린이 도서관을 설계했다. 이런 작업으로 지역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주는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투병 중에도 활발하게 작업했으며 박경리문학의집 건축설계를 맡았고, 작년 말부터 지난 1월말까지 일민미술관에서 건축전을 열기도 했다.
건축계의 공익요원 정기용 건축가
정기용, 흙의 숨결을 사랑한 ‘건축계의 공익요원’    유인화 선임기자

ㆍ66세로 별세(1945~2011)

지난 11일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해방둥이 건축가 정기용(성균관대 석좌교수·기용건축 대표)은 공공건축의 대가였다. “땅이 살아야 한다”며 흙의 숨결과 정신을 보듬었던 그가 66년 동안의 세상나들이를 마치고 자신의 희망이던 흙으로 돌아갔다.

고인은 사람과 땅의 소리를 듣는 ‘감응의 건축가’였고, 공공건축의 대부로서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공 디자인은 삶을 조직하는 과정”이라고 설파한 그는 “건축가는 단순히 집을 설계하는 게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자연과 주민, 사회에 답하는 사회적 조절자가 되어야 한다”며 “부동산 투기에 빠진 한국은 삶이 녹아있는 자기 집을 때려부수는 것을 플래카드 걸어 경축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1월30일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감응:정기용 건축-풍토, 풍경과의 대화’는 세상의 여정을 마감한 전시가 되고 말았다. 전시는 고인의 건축철학과 모든 족적이 차근차근 알기 쉽게 정리된 역작의 아카이브전이었다. 196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건축 스케치와 드로잉 100여점이 나왔다. 자료마다 고인의 생각과 숨결이 배어 있는 한국 건축 사료들이다. 그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건축 도면이나 모형·자료를 단순히 모아놓는 전시는 원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11일 전시 개막일에 ‘감응’을 주제로 한 고인의 강의는 세상에 대한 고별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왜 흙을 탐닉했을까. 프랑스 유학 중이던 78년 잠시 귀국한 그는 전국 농촌마을을 돌아보면서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새마을운동은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 문화적 학살”이라고 정의했다.

고인은 이후 논문 주제를 ‘한국 농촌의 변화’로 바꾸고 농촌 경제와 문화를 공부했다. 조상 대대로 지어온 흙집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파리 제6건축학교에서 건축사 자격을 얻고 돌아오기까지 13년. 그는 인류 공통의 건축 재료인 흙을 재발견했다. 그러나 수천년간 건축재료로 활용된 흙이지만 막상 흙 건축에 손을 대려니 기록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85년에 만난 충남 예산군 구억마을 장용순옹(당시 72세)은 그의 흙 건축 스승이 됐다. 현대무용가 홍신자씨 등 지인들이 그에게 흙 건축을 부탁했다. 그의 흙 건축물은 낮은 담, 풍경이 보이는 큰 창, 담쟁이 등이 특징이었다.

농촌 등 공동체 문화에 뿌리를 둔 그의 건축철학은 86년 귀국 후 처음 설계를 맡은 서울 을지로입구의 옛 서울투자금융 사옥(현 SK네트웍스빌딩)의 ‘하늘정원’으로 첫 결실을 맺었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20층짜리 건물의 중간인 10층 전체를 시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쉼터와 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흙의 철학으로 지은 건물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전북 무주에서 99년부터 10여년간 무주군청, 공설운동장, 무주시장, 면사무소 4개소 등 공공건물 30여채를 지은 무주프로젝트, 계원조형예술대학(1990), 효자동 사랑방(1993), 동숭동 무애빌딩(1993), 청계동주택(1995), 진주 동명중·고등학교(1996), 서울예전 드라마센터 리노베이션(1996), 영월 구인헌, 춘천 자두나무집(2000), 어린이도서관(순천, 제주, 서귀포, 진해), 코리아아트센터(2003), 무주 곤충박물관, 파주 은하출판사, 파주 열림원(2006),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2007) 등 다양한 공공건축물, 교육시설, 주택 등을 설계했다.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한 인연으로 농부의 삶을 살고 싶어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살기 좋은 농촌 만들기를 꿈꾼 고인은, 흙과 나무로 만든 봉하마을이 ‘봉하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되자 “사저를 비하한다”며 노 전 대통령에게 기자회견을 간청하기도 했다.

‘공공건축의 대가’로서 유명해진 건 2003년 문화방송이 기획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순천·진해·서귀포·김해·제주·정읍 등 여섯 곳의 어린이도서관을 설계한 작업 덕이다. 건축가의 일방적 건축에 반대하는 그의 견해는 정읍 도서관의 설계 과정에도 반영됐다. 고인은 “이 건물은 몇 년 전부터 공동체 도서관을 꾸리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배운 대로 설계한 것”이라며 “건축가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지 그 땅에 없던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인이 처음부터 미술에 관심있던 건 아니다. “학비가 아쉬워 공부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공짜로 켄트지를 준다기에 미술부를 지원했는데, 제법 잘 그린다는 얘기를 믿고 미대에 갔죠. 그런데 데모로 인한 휴교가 잦아지면서 ‘세상이 절박한데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재주가 부족한 탓이었겠죠.”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과의 친분으로 1년간 강의를 나온 김수근을 통해 ‘건축’이라는 학문을 알았고, 19세기 영국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으며 건축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서울대 미술대학 및 서울대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한 그는 75년 프랑스 파리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78년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마친 후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82년 파리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한 후 75~85년 파리에서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고, 귀국 후 86년에 기용건축을 설립했다.

또 한양대·서울대·성균관대·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출강,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 문화연대와 평화박물관 공동대표, 문화재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시건축연구소, 도시건축집단 ubac에서의 작업 등 바삐 활동했다. 저서로는 <사람 건축 도시> <감응의 건축>(이상 2008), <기억의 풍경>(2010) 등이 있다.

건축가임에도 “바빠서 내 집 지을 시간이 없다”던 고인은 서울 명륜동 다세대 셋집에 살면서 “집은 일상이 반복되는 친숙한 공간일 뿐이다. 창에서 바라보는 북악산과 종묘, 창덕궁, 창경궁, 비원이 모두 내 집터”라며 집의 물리적 구속력을 경계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살아 숨쉬는 흙의 품에 안겼다.

그와의 이별은 16~21일 북촌미술관에서 열리는 ‘2011년 봄, 정기용을 응원하다’ 전시에서 이어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경씨(63)와 아들 구노씨(33·건축가)가 있다. 건축가, 1945년 8월4일 출생, 2011년 3월11일 별세.





[문화 노트] ‘건축계 공익요원’ 정기용이 남긴 한마디 “고맙습니다”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

11일 66세로 타계한 건축가 정기용(1945~2011) 선생의 별명은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다.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남기는 설계보다 여럿이 함께 잘 살기 위한 집짓기에 열심이었다. 건축이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천천히 바꾸는 데는 한몫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자신의 건축물로 실천했다. 열이면 열 사람 다 불가능한 일이라 고개를 저었던 ‘기적의 도서관’을 기적처럼 전국에 퍼트렸다. 무주 구천동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탕과 공설운동장을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감응(感應)의 건축을 보여줬다.

 하루를 천년 같이 살던 그가 몇 년 전 건강검진을 받은 계기도 병원을 지으려면 병원을 잘 알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환자의 눈으로 병원을 살피겠다며 입원했던 그는 뜻밖에 스스로 ‘깊은 감기’라 이름 붙인 암 판정을 받았다. 일을 미뤄두지 못하는 고약한 성미의 그는 불량환자가 됐고, 기적의 완치를 간구했던 선후배와 제자들의 애통 속에 눈을 감았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있던 14일 아침,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정기용 선생을 떠나 보내는 짧은 의식이 열렸다. 건축계와 문화계 사람들 200여 명이 모인 앞에서 그에게 건축을 배운 한 여학생이 목이 메어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고인은 며칠 전 그가 이끌던 ‘기용 건축’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아차산으로 봄나들이를 갔다고 한다. “봄내음 가득한 하늘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풀러 나간 그 자리에서 선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은 ‘고맙습니다’는 한마디였다고 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남학생의 흐느낌이 장내로 번져나갔다.

 정기용 선생은 건축이 왜 인문사회학이자 인간학이 돼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사람과 인생이 전제되지 않은 건축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쳤다. 인류 문명의 오만함이 제 풀에 무너지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오늘, “그 사회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열린 마음이 건축가의 근본”이라 했던 선생의 목소리가 벌써 그리워서 코끝 시큰하다. 16일부터 21일까지 서울 가회동 북촌미술관(02-741-2296)에서 열리는 ‘2011년 봄, 정기용을 응원하다’ 전시가 아쉬움을 잠시나마 덜어주려나.



  ▷ 의견 목록 (총0개)
 
아이콘
Selected Icon
목록
△위쪽 : 꽃보다 환한
▷현재 : 건축계의 공익요원 정기용 건축가
▽아래 :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