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문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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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역사

토지는 1969년 9월부터 연재되었지만,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작품이었다. 박경리는 작품을 연재하기 3,4년 전쯤 한 수필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고 밝히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습작을 해 왔었다고 고백하였다. 실제로 이전의 작품들에 나오는 모티프나 인물형상화, 구성적 특성 등은 토지에 종합되어 나타난다.

이중 토지의 사건이나 인물화에서 직접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작품으로 평사리 풍경의 중요한 밑그림이 되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과, 작가의 진주여고 체험이 직접적으로 재구성되어 토지 5부에 이어지는 환상의 시기,옛날이야기가 있다. 특히 토지를 연재하기 10개월 전인 1968년 11월, <월간문학> 창간호에 실린 중편소설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은 강청댁과 용이, 그리고 월선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것으로 토지의 1부 중의 한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그렇게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결국 26년이나 걸리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박경리는 왜 그토록 간절하게 이 작품을 쓰려고 했을까

“문단에 나오기 전에 외가의 먼 친척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즉 어느 시골에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있어 풍년이 들어 곡식이 무르익었는데도 호열자가 나돌아 그것을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벼가 누렇게 익었는데 마을은 텅 빈 그런 풍경이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할까. 그 뒤 문단에 나와 작품을 쓰다가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그때부터 그것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자꾸 생각이 바뀌고 했지만요.”(박경리와의 대화- 소유의 관계로 본 한의 원류, 김치수, <박경리와 이청준>, 민음사, 1982, 165-166쪽.)

박경리는 ‘풍요로운 대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강렬한 이미지의 대비가 토지를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어느 부잣집이 저주를 받아 대가 끊겼다는 이야기, 근친간의 사랑, 육촌 남매의 비극적인 연애사건 같은 것도 작품을 쓰게 한 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또 이런 이야기에 알맞은 시대배경을 설정하기 위해 흉년이 일어나고 1902년 호열자가 창궐하기 조금 전인 18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토지가 구한말 우리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26년간에 걸쳐 창작된 사연은 그러하다.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되었다. 토지 1부 연재가 시작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상당한 기간 침묵을 지켜온 박경리씨의 장편을 이 달부터 새로 연재한다’는 짧은 편집후기와 작가가 ‘오랫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었다’는 말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을 뿐 연재기간 내내 작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침묵을 깬 것은 연재가 끝나자마자 나온 1부 단행본이었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 ‘한국현대문학사의 최대걸작’, ‘한국문학으로서 확실한 전기가 될 문제작’ 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토지는 이 때 창간된 <문학사상>으로 옮겨 연재가 지속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977년 1월부터 토지 3부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잡지, <주부생활>과 <독서생활>에 동시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토지는 KBS에 의해 처음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1979년 11월부터 1980년 8월까지 토지 1,2,3부가 방영되면서 독자들의 토지에 대한 관심은 무척 커졌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론이 1980년대 중반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는 토지 4부 연재에 대한 독자들의 강한 기대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경리는 4부의 연재에 거듭 실패하고 만다. 작품은 이미 처음에 작가가 계획했던 규모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외부의 요구를 냉정하게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4부는 <문학사상>에 연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창간호부터 2부를 연재했던 <문학사상>은 지령 100호를 맞아 다시 토지를 연재하겠다는 광고를 내고, 이 작품에 대한 김치수의 해설을 3개월이나 연재했으며, 1981년 5월호에는 ‘내달부터 고대하고 있던 박경리씨의 토지 4부가 게재된다’는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어찌된 사정인지 토지 4부는 그로부터 4개월이나 지난 후 <마당> 창간호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시사종합지 <정경문화>에 연재되었다.

1980년대 말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 토지는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4부 연재를 끝내고 작가가 낸 시집과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가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79년부터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단행본 토지가 매년 판을 거듭하며 팔려나갔다. 그리고 1992년 9월 1일, 새로운 포맷의 특수지인 <문화일보>에 그 5부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2년 후인 1994년 8월 30일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신문과 잡지는 앞 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고, 최초로 토지를 연재했던 <현대문학>은 무려 125쪽을 할애한 특집을 실었으며, <작가세계> 역시 박경리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토지에 대한 평문과 단행본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토지라는 거대한 ‘탑’을 기리는 문학적 잔치가 1994년 하반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토지 연재 26년간 작가는 40대 초반의 중년에서 70이 다 된 노인으로 늙어갔으며, 중견작가에서 어느덧 원로작가로, 그리고 이제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영향력 있는 ‘문사’로 대접받기에 이르렀다. 집필지를 원주로 옮긴 1980년 무렵부터 박경리는 인터뷰를 통해 작가로서보다 주로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밭을 매고 연탄을 갈며 고추를 따고 잡풀을 뽑는 등 언제나 일하는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고, 그 모든 노동이 토지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고백했다. 환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표면화된 것은 5부 연재시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직을 맡은 것이었다.

작가는 이 무렵부터는 환경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를 하며, 청계천복원운동에서 앞장서는 등 환경운동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박경리가 간여하고 있는 ‘토지문화관’이 환경문제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고 환경과 문학을 공동주제로 하는 계간지 <숨소리>를 간행한 것도 그 실천의 하나이다. 이제 토지의 작가는 스스로 야인(野人)이라 칭하면서 이 시대의 문제를 찾아서 지적하고, 작품 밖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존재이자 환경 파수꾼이 되었으며, 토지는 이런 작가의 모습에 의해 생명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로 새로 읽혀지고 있다.

 

이상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